케리그마 세미나 - Kerygma Seminar
영등포중앙교회 위치
* 첨부파일에는 각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II-8. 구원의 십자가와 새 계약에 대한 선포
(예레미야)
*** 외울 성구: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렘 30:8)
*** 함께 읽을 성경: 예레미야
*** 토의주제: 1. 당신은 삶의 고통을 당하게 되면 무엇부터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은 사랑하는 자녀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왜 책망하십니까? 3. 당신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억압한 바벨론, 그리고 인근의 족속들이 왜 심판을 받았는지, 이해하고 계십니까? 5. 이해가 잘 안되면,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를 더 미워하는 이유를 생각하십시오!
A.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시한 예레미야의 멍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곧 ‘여호야킴〔= 엘리야킴〕(609-598)’, ‘여호야긴’, ‘시드기야〔= 마따니야〕(597-586)’의 통치시기에 활동하던 대언자로서 유다의 멸망과 동시에 구원의 새 역사의 전개를 선포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그의 실질적인 대언활동 시기는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킴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렘 1:3)입니다. 이때의 역사적 상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집트가 유다를 속국으로 만들고 여호야킴을 봉신으로 왕위에 앉혔습니다. 그 후 신 바벨론이 이집트를 가나안 지경에서 몰아내자 여호야킴을 어쩔 수 없이 바벨론 느부갓네살 2세에게 충성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야킴은 이집트의 지원 약속을 믿고 틈만 있으면 바벨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이집트는 여호야킴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합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 아마도 이때에 여호야킴은 살해되었을 것입니다 - 그의 아들 ‘여호야긴’과 상당히 많은 정부 고급 관리를 포로로 사로잡아 갑니다. 그리고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의 섭정봉신으로 임명됩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로써 독립 왕국 유다의 종말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소명기사에 의하면, 그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로 성별하여 세워졌습니다. “내(= 여호와 하나님)가 너(= 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언자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렘 1:8)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소명기사에서 우리는 두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대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선택받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곧 ‘선택받은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비교. 사 7:14) 둘째는 그도 여전히 우리와 동일한 나약한 ‘아이’, 곧 ‘죄인罪人’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이 r['n"(나아르’)는 남성명사 ‘r['n: 나아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아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 혹은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언자, 예레미야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시적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시현示顯해보이는 것으로 ‘바벨론의 멍에’를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렘 27:8) 이것은 예례미야가 유다의 죄 때문에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삼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도 ‘고난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그(= 고난의 종)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멀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의 특색(Proprium)은 다른 데 있다. 여기에서 야웨 말씀의 사자(Bote)는 그의 백성과 함께 살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존재로 나타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 한 유다와 함께 고난 받는 대언자, 예례미야의 십자가는 온 인류와 함께 고난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대제사장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나무로 만든 멍에’가 꺾이자, 그가 다시 ‘쇠로 만든 멍에’를 메고 다녔다는 것은, 유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렘 28:13-14) 이는 동시에 아담Adam 이후의 죄악을 범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예시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언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한 책이 불태워진 것은(참조 렘 36:23)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수난’이자 동시에 대언자, 예레미야의 수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거역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증언하는 자들이 하나 같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러했고, 사도 바울이 그러했고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집사 스데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때에 그의 증언을 거부하는 유대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조 행 7:51-53, 57-58)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지와 아나돗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렘 11:21, 비교 렘 1:1)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과 유사하고, 자신의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과도 유사합니다.(참조 마 26:57-58,70,72,75)
뿐만 아니라, 대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연설’(7장)에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성전)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0-11, 참조 렘 26:6)고 선포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하신 말씀, 곧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2-13) 라고 책망하신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거민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대언자, 예레미야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군중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할 위협에 처하고, 끝내는 살해당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렘 26:8-9) 이와 유사하게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까 항상 음모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마 26:59);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마 27:1-2, 이밖에 막 14:55; 요 11:53)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한 설교와 그가 ‘대언 활동’을 하다가 당한 수난과 그가 짊어질 수밖에 없어던 ‘멍에’와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언자 예레미야가 당한 수난과 죽음은 - ‘누구를 위한 것이냐’하는 그 대상만 다를 뿐 -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로 인하여 당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유형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다에 남아 있는 자’, 곧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을 선포함으로써,(렘 42:10-11)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병행 막 13:13 이밖에 마 24:13)고 구원을 선포하신 말씀의 예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B. 새 언약을 통한 구원의 약속
유다 왕조의 패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예레미야지만, - 심판선언이 아니라 - 오히려 회개 촉구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참된 대언자들의 위임사항이었듯이, 예레미야 대언자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 체결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는 마지막 날에 있을 여호와 하나님과 새로 체결된 새 언약에 대하여 예언합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이상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 주는 의미는, 첫째로,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고, 둘째로,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가려내기 위한 재판裁判, 혹은 심판審判하기 위한 언약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에 따라서 “내(= 여호와)가 그들(= 이스라엘 백성)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지만”(렘 31:31bf) 새 언약은 “내(= 여호와)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이 순종하고 지키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법을 사람들의 속에 두어,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새 언약은 “내(= 여호와)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언약은 ‘죄 용서, 곧 죄 사함’을 위한 ‘은총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일즈Brevard S. Childs는 예레미야의 구원에 대한 신탁(렘 30-33장)을 가리켜 말하기를, “구원이라는 요소는 예레미야의 사역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나타났으며, 그의 소명 내에서 일종의 표제 같은 기능을 부여 받았다. 그의 예언적 임무는 ‘파멸하며 넘어뜨리면 건설하며 심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이중적 역할의 주제는 독립된 산문체 발언들(18:5ff; 24:6; 31:28; 42:10; 45:4)을 통해서 책 전반에 걸쳐서 계속 되풀이 되고 있다. 이 예언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혹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한 언약은 동시에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신탁을 동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잡히시던 날 밤’ 체결된 새 언약으로 그 의미가 성취됩니다. “그들(= 예수의 제자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비교 눅 22:19-20)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새 언약은 -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 대한 예언처럼 - ‘죄 용서의 언약’이고, ‘은총의 언약’이며, 동시에 ‘구원의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을 통한 죄 용서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기서 혹자는 질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대언자, 예레미야의 수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해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단지 유사성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빈약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히브리인의 ‘시간관’을 이해하면 간단히 답변될 수 있습니다.
난외연구 1: 시간의 ‘순환’과 ‘선’이 아니라, ‘반복적 주기’
우선 인류가 - 시계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 - 때를 측정하는 것은, 물리적 시간에 의해서 측정되지 않았고, 육체적 주기성Rhythmus에 의해서 감지感知되었습니다. 예컨대 여인들은 자신의 생리生理를 통하여 한 달(一月)이라는 시간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생리生理를 ‘월경月經’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이러한 생리적 혹은 신체적 감각을 통하여 시간을 감지하였습니다. 예컨대 철새들이 이동하는 날짜를 정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체적 리듬에 따른 변화에서 이동의 시간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개미가 장마를 앞두고 이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게 있어서 주관적主觀的인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잠과 깸’, ‘일과 휴식’, ‘식사 시간’ 등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충분히 잠을 자고 8시간 후에는 자연히 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짧은 주기는 심장의 고동, 맥박, 호흡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외에 인간이 신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주기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시점時點과 時點 혹은 하나의 지점地點과 다른 하나의 地點 사이에 존재하는 객관적 거리距離를 움직이지 않고도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밝음과 어두움의 규칙적인 교체, 혹은 달의 변화와 단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 주기성에 의해서 시간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시간을 무한한 발전 혹은 변화로 보지 않고, 일정한 주기의 반복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는 표현은 시간의 주기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수평적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창조 역사가 ‘제7일 안식일’로 끝나고, 이스라엘 역사가 ‘주님의 날’로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역사가 ‘마지막 날’의 ‘안식’으로 끝나는 주기성과도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가가 증언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기)”(사 44:6) 때문이고, 그 분만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 이렇듯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주기성’은 그리스 헬라인들은 ‘원’ 혹은 ‘순환’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태양의 순환에서 본 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태양의 순환운동이 시간의 방향 설정을 위해서 이용되면서, 동시에 태양의 순환 운동에 관한 표상이 해당 시간에 전용된 것이라고 오렐리C. v. Orelli는 말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은 태양의 운행에서 시간적 방향을 정하지 않고, 오히려 달의 변화 양상의 규칙적인 교체와 빛과 어두움, 더위와 추위의 주기적 교체에서 시간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생人生도 주기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네(= 아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도 주기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天下萬事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1-5f) 이것을 다시 전도서 기자는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고 말함으로써, 앞의 모든 일이 주기적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환을 가리켜 히브리어는 ‘dor’라고 말한다. ‘רידdor’는 ‘רודdur’(순환, 원)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주기週期’가 근본 사상이고, ‘순환’은 주기의 형상形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주된 것은 주기입니다. 이 주기가 있기 때문에, 예컨대 ‘약속과 성취’라는 ‘역사의 유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기를 히브리인들은, ‘별들의 운행’ 혹은 ‘태양의 운행’에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원무圓舞’에서 알게 된 것이라고, 보만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처음은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기자가 일곱째 날에는 저녁과 아침에 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이유는 - 보만에 의하면 - “제7일은 그 자체가 안식일이며, 일주一週라는 더 포괄적인 주기, 즉 휴일 - 평일 - 휴일의 마지막(과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월月의 주기는 초승으로부터 시작하여 - 만월滿月(혹은 월의 전환) - 초승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해 바뀜은 추수가 끝난 후의 가을이고, 즉 해가 기운이 쇠퇴하는 시기였습니다. 한 인간의 일생은 - 창세기 3:19절에 의한 삶의 한 주기 - 흙에서 생겨나서 - 살다가 -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분히 히브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주기적 시간관’에 의하면, 작은 주기가 차면, 보다 큰 주기로 넘어갑니다. 예컨대 4주가 되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12번 반복하면, 1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그 단위를 7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7의 주기는 안식년과 희년의 주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주기든 그 마지막은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레 25:10-13) 한 마디로 말하면, ‘희년’에는 모든 것이 원위치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7 x 7 = 49년 그리고 그 다음 해는 ‘희년禧年’으로서 새로운 주기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희년’에는 노예도 해방되고, 땅도 해방되고, 모든 것이 억눌리고 억압되었던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해입니다. 이 희년의 해가 바로 모든 주기가 끝나고 새로운 커다란 주기가 시작하는 해입니다. 그 해는 바로 ‘참 안식의 해’입니다.
이런 점에서 창조역사의 거대한 주기가 ‘제7일 안식일’로 끝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의 역사관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계시록이 세상의 종말을 옛 것이 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1,4-7) 옛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이전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 생명이 주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