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히브리 유목민의 삶에서 창조기사를 읽어라

- 유목민의 생명여건으로서의 ‘물과 땅’ -

 

 

 

1. 히브리 유목민의 생명 여건으로서의 ‘물’

 

히브리인의 최초 신앙고백인 신명기 26장 5절은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 ” 라는 말로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인 야곱도 목축업이 주업主業인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창 46:33-34)라고 권면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은 유리하는 유목민遊牧民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 역시 ‘이드로’의 양을 치는 목자였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 .”(출 3:1) 심지어는 ‘아벨Abel’도 목자였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베를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Cain은 농사하는 자여더라.”(창 4:2)

그런데 유목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축들에게 먹일 ‘물’과 ‘풀’이다. 광야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물’과 ‘풀’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축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간혹 ‘목자’들 사이에 ‘물과 풀’ 때문에 다툼이 있곤 하였다. 이점을 우리는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의 목자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7-8) 그래서 아브람과 롯은 서로 헤어지기로 합의하였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그래서 롯이 택한 요르단 지역은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창 13:10)

이렇듯 유목민들 사이에는 ‘물’을 구할 수 있는 ‘우물’ 때문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6:20-22) 그래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도 아비멜렉을 책망하였다.(창 21:25) 따라서 히브리 유목민에게 있어서 ‘우물’은 재산이므로 사고, 팔기도 하였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창 21:30) 이렇듯 ‘우물’은 한 개인의 소유가 되어, ‘우물’의 소유주는 ‘물을 깃고’ 다시 ‘우물’의 어구를 막아두었다.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창 29:2-3)

반면에 ‘우물’을 메우는 것은,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는 사람들의 생업을 망하게 하는 것이요,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람(=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창 26:13-15) 이러한 점에서 ‘물’은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는 ‘생명’ 그 자체였다. 첫째는 유목민의 양과 소떼들이 물을 먹어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으며, 둘째는 유목민 자신들이 ‘물’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인간들에게 ‘물’, 곧 ‘생수’를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다. 우선 이점을 우리는 - 연대기적 성경증언 순서에 따르면 - ‘하갈’의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 21:15-17a, 19)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떠나온 이후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에, 그들에게는 마실 물이 없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고 원망하였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출 17:5)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내(= 여호와 하나님)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 17:6)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다.)”(민 20:11) 이렇게 바위에서 물이 나옴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목축들은 갈증으로 인한 사망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 애굽하여 ‘마라’에 이르렀을 때 -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 모세로 하여금 ‘한 나무를 꺾어 그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다.(출 15:23)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생수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2. 히브리 유목민의 소망인 ‘땅’

 

앞 절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은 ‘유리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주 ‘목자’로 표징 되었다. 목자는 풍성한 ‘목초牧草’가 있는 곳으로 자기 양떼를 인도하여 자기 양 떼들이 배불리 먹도록 한다. 그러던 중 ‘목초’가 빈약해져서 염소와 양떼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장막을 거두어 이동한다. 이것이 유목민의 삶이다. 그래서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양 떼를 치다가, 목초가 많은 곳을 찾아 호렙 산까지 이르게 되었다.(참조 출 3:1)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도 ‘목초’가 풍성한 곳을 찾아 다녔다.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창 37:17) 그래서 히브리 유목민들에게는 자신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땅’이 없었다. 따라서 역으로 매번 풍성한 목초지를 찾아 유리 방랑하는 유목민 히브리인들에게는 한곳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는 ‘’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일생一生 가운데 가장 큰 소망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인들의 조상 아브람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약속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가장 크고 영원한 ‘복福’이었다. 그래서 부르게만Walter Bruggemann은 자신의 책,